나의 카지노 인생 1

나의 카지노 인생 경험담..
다시는 헛된 꿈을 꾸지 말자..
아무리 힘이 들더라도 아직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오늘도 이렇게 되뇌이며 하루를 시작한다..
1988년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 해외 출장을 더욱 자주 갈 수 있게 되었다.
남의 것을 탐한 적도 없고, 공돈을 바라본 적도 없던 내가 무슨 이유로 카지노에 발을 들여놓았을까.
지금도 수없이 생각하고 후회해 본다.
칠순을 훌쩍 넘기신 아버지께서 희끗희끗한 머리로 먼 길을 오셨다.
그 먼 고한과 사북을 거쳐 청량리에서 기차를 타고 나를 찾으러 오셨을 때, 나는 왜 아버지를 피해 달아나야 했을까.
노구를 이끌고 아들을 살리러 오셨건만, 나는 그 마음을 외면하고 도망쳤다.
그 일을 겪은 후, 홀로 눈물을 흘리며 후회하고 다시는 이런 일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실천하지 못했고, 결국 내 인생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이제는 너무나 많은 후회와 회한이 나를 짓누른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던 내게 아직 가족이 남아 있었다.
내가 잃은 수억 원의 돈, 두 개의 회사, 수많은 친구들보다도 소중한 가족이 있었기에 다시 한번 내 인생의 걸음마를 시작해 보려 한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길을 걷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며, 단 한 분이라도 이 글을 읽고 다시 삶의 희망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1989년 어느 봄날, 바이어와 상담을 위해 마닐라 공항에 도착했다.
언제나 그렇듯, 비행기에서 내려 보딩 트랩을 밟는 순간부터 가슴이 답답해졌다. 4~5월의 더운 시즌이라 그런지 숨이 턱 막힐 정도였다.
바이어와 차를 기다리는 동안 철조망 너머로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소년, 소녀들이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외치며 꽃다발을 내밀거나 빈손을 내보였다.
왠지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뜨거운 공기보다 더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차에 올라타 EDSA 거리 근처의 샹그릴라 호텔로 향했다.
3박 4일 출장의 마지막 밤, 바이어가 늘 하던 것처럼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고 했다. 그린힐스 근처의 중국집에서 식사를 마친 후 술 한잔하자며 로하스 거리의 룸살롱으로 향했다.
대충 즐기는 척하다가, 출장 내내 잊히지 않았던 어린 아이들의 눈망울이 떠올라 먼저 자리를 떴다.
거리를 걷다 우연히 카지노가 눈에 띄었다. 순간, 어린아이들의 모습은 사라지고 중국 배우 주윤발과 유덕화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구경이나 한번 해볼까.’
담배 한 대를 물고 카지노에 들어섰다.
그곳은 내 상상 속 카지노보다 훨씬 화려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슬롯머신 소리, 떨어지는 코인 소리, 돈을 베팅하며 광기 어린 눈빛으로 테이블을 응시하는 사람들. 아나운서 멘트처럼 장내는 흥분의 도가니였다.
한층 위로 올라가니 아래층보다는 차분한 분위기였다. 그래도 가끔씩 터져 나오는 환호성과 고함 소리는 여전했다. 한쪽에는 VIP 전용 공간이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경비원이 길을 막았다. 미소를 지으며 "바낏?(왜?)"이라고 현지어로 묻자, 그는 놀란 듯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길을 터주었다.
VIP 룸 안은 한층 더 고급스러운 분위기였다. 엑스오급 술이 병째로 제공되고, 배부른 차이니즈들이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다.
간이 테이블에 앉자 짧은 치마를 입은 웨이트리스가 다가와 무엇을 마실 것이냐고 물었다. 당황스러웠지만, 주변을 살펴보니 공짜로 제공되는 듯했다.
헤네시 한 잔과 가벼운 스낵을 주문하고 테이블을 살펴보았다.
게임을 구경하던 중, 로컬인 한 명이 계속 승리하는 모습을 보았다.
‘이 사람을 따라가면 대박이겠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칩을 교환했다. 300달러를 주니 100달러짜리 칩 세 개가 나왔다.
가볍게 시작해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딜러가 내 베팅을 막았다. 이유를 묻자, 최소 베팅 금액이 500달러라고 했다. 순간 창피함이 밀려왔다.
주저하던 찰나, 한 중국인이 다가와 700달러를 바꿔주겠다고 했다. 결국 1,000달러를 베팅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한 달 치 월급을 한 번에 걸다니, 후회가 밀려왔다. ‘잃으면 다시는 오지 말자.’ 그렇게 스스로 다짐했다. 그러나 결과는 승리였다.
딜러가 천 달러짜리 칩을 건넸다. 2시간도 안 되는 시간에 3천 달러, 당시 환율로 200만 원, 즉 세 달 치 월급을 벌었다.
이 기쁨을 안고 호텔로 돌아와도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나의 도박은 시작되었다.
귀국 후 생활은 변함이 없었다. 성실하게 출근하고, 밤늦게까지 야근을 했다.
그러나 한 달 후, 다시 출장 일정이 잡혔다. 그리고 또다시 카지노를 찾았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카지노 방문이 점점 잦아졌다. 90년대 초중반까지 갈 때마다 적게는 몇백 달러, 많게는 몇만 달러를 벌었다.
국내에 달러 계좌까지 개설했고, 가족들 명의로도 여러 개의 계좌를 만들어 항상 5만 달러 이상의 돈을 예치해 두었다. 주식 투자도 했고, 직장 생활도 잘 풀렸다.
열심히 일한 덕분에 빠른 승진도 가능했다. 결혼도 했고, 경제적 여유 덕분에 친구들에게도 베풀 수 있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나는 내가 도박에 중독되었음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한 달에 한두 번 카지노를 찾는 것이 전부였고, 돈을 벌었다는 사실 외에는 별다른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내 주변에는 나처럼 도박을 하다 무너지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일이 내게도 오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결혼도 하고,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여인과 아이도 생겼다.
세상 모든 것이 행복하기만 했다. 안정된 직장, 건강하신 부모님, 사랑스런 내 가족들. 그런 내게 재테크에 대한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지금도 행복하지만, 더 부자가 되고 싶은 욕망이 솟아났다. 왜 이런 생각이 들었을까?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충분히 행복했는데.
나는 많은 돈을 주식에 넣었다. 처음엔 잘 풀리는 듯했지만, 서서히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았다.
잘될 거라고 믿으면서. 주가는 계속해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나는 관망하고 있었다. 곧 오를 거라고 믿으면서. 마치 바카라에서 줄 꺾이기를 기다리는 심정이었던 것 같다.
마침 잘 아는 은행 대리가 대출을 권유해 왔다. 속으로 '내 돈 필요한 걸 어떻게 알았지?' 하고 놀라면서도, '역시 신이 나를 돌보시는군' 하는 생각에 별다른 의심 없이 대출을 받았다.
그렇게 계속 물을 긷는 동안에도 주가는 쉴 새 없이 곤두박질쳤다. 이제 내겐 달러 통장밖에 남은 게 없었다. 은행 대출금만 억 단위였다.
생활도 바뀌었다. 항상 1시간 전에 출근하던 내가, 밤에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해서인지 간신히 지각을 면할 정도가 되었다.
상사들이 자주 "요즘 무슨 걱정 있냐?"고 물었다. 하지만 난 솔직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아닙니다. 아무 문제 없습니다." 이렇게 둘러대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이때라도 솔직하게 털어놓고 도움을 청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은행에서 대출 이자 독촉장이 날아왔다. 달러 계좌를 깨야 할 상황이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2년 전에 치과 의사 친구에게 서 준 3천만 원짜리 연대보증이 문제가 되어, 나에게 빚을 갚으라는 통보가 왔다.
당장 갚지 않으면 월급을 압류하겠다는 엄포까지 놓였다.
누가 치과 의사가 부도가 날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아,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나. 대출 이자도 못 내서 은행마다 일시 상환하라고 난리인데.
집에 사실대로 털어놓고 도움을 받을까? 아니면 대충 수습할 수 있을 때까지 해보고,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 볼까?, 이런 생각에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일단 대출 이자부터 갚고 기한을 연장해야 했다. 주식은 깡통이 되었으니 정리하고, 그동안 들어놓았던 개인연금, 보험, 정기적금까지 닥치는 대로 정리했다.
정리가 된 건 하나도 없었지만, 이제 겨우 한숨을 돌리려나 싶었는데, 지금도 끔찍한 IMF 사태가 터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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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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